제주 떠나 정읍에서 - 제주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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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떠나 정읍에서 - 제주 문학기행
  • 송영기 기자
  • 승인 2022.11.23 0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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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귤림서원이 있던 자리. 오현단 五賢壇은 조선시대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현지인들을 가르쳐 교학발전에 공헌한 다섯명의 현인 賢人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
( 예전에 귤림서원이 있던 자리. 오현단 五賢壇은 조선시대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현지인들을 가르쳐 교학발전에 공헌한 다섯명의 현인 賢人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

 

[서울=글로벌뉴스통신]

 

        제주 떠나 정읍에서*

- 오현단五賢壇 우암 송시열 적려비 탐방

 

                         송 영 기

 

삼천번 실록 거명 오히려 구차하다

살아서 올곧음을 가르치고 지켰으니

주상의 탑전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네

 

강진서 뱃길가다 보길도* 머물었고

탐라서 석달 열흘 한양으로 압송 중에

정읍서 만난 금부도사 저승사자로구나

 

공자님 수명 팔십 송자*도 잘 아심에

의연히 사약받고 한 사발 더 청하시니

문하에 제자 구름같고 '죽어 명성 만대'가네*

 

가슴에 쌓은 학문 일신에 담은 덕망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하고 줄기차서

고종명 아니 했어도 이 강산을 굽이쳤네

 

(오현단을 들어서면 서있는 우암 송시열의 '우암 송선생 적려 유허비' . 원래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 칠성동에 위리안치되었으나, 지금은 쇼핑거리로 건물들이 들어서 유배지에 세워져 있던 유허비를 이곳 귤림서원터인 오현단으로 옮겨 세웠다. 사진 왼쪽은 연암 박지원의 후손 박찬구 시인, 오른쪽은 은진송씨 17세 우암 송시열의 후손 강화 경력공파 經歷公派 27세 송영기 시조시인. 물론 은진송씨의 누대로 이어온 종가집은 대전 회덕 송촌 宋村 쌍청당 雙淸堂에 종손 종가 宗家가  있고, 또한 우암 문정공파의 직계 종손은 따로 있다.)
(오현단을 들어서면 서있는 우암 송시열의 '우암 송선생 적려 유허비' . 원래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 칠성동에 위리안치되었으나, 지금은 쇼핑거리로 건물들이 들어서 유배지에 세워져 있던 유허비를 이곳 귤림서원터인 오현단으로 옮겨 세웠다. 사진 왼쪽은 연암 박지원의 후손 박찬구 시인, 오른쪽은 은진송씨 17세 우암 송시열의 후손 강화 경력공파 經歷公派 27세 송영기 시조시인. 물론 은진송씨의 누대로 이어온 종가집은 대전 회덕 송촌 宋村 쌍청당 雙淸堂에 종손 종가 宗家가  있고, 또한 우암 문정공파의 직계 종손은 따로 있다.)

 

(註) *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 1607~1689)

        천하대로 송자 天下大老  宋子

     * 귀양가다 태풍을 피해 '보길도'에서 지은시

 

                 海中有感

        八十餘年翁  滄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北闕空面首  南溟但信風

        貂구舊恩在  感激泣孤忠  (宋時烈)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만리 푸른물결 한가운데 왔도다

       말 한마디가 어찌 큰 죄랴마는

       세번이나 내쫒겼으니 앞이 막혔구나

       북녁 대궐을 향해 머리를 돌려보지만 

       남쪽 바다에는 계절풍만 부네

       귀한 옷을 내리셨던 옛 은혜를 생각하면

       외로운 충성심에 눈물만 흐르는구나

 

(제주성지 城址 옛 성벽 아래 있는 오현단. 중앙 제단에 작은 도마처럼 나란히 일렬로 세워져 있는 조두석 俎頭石이 다섯명 선비의 위패이다. 그들은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선비이다.)
(제주성지 城址 옛 성벽 아래 있는 오현단. 중앙 제단에 작은 도마처럼 나란히 일렬로 세워져 있는 조두석 俎頭石이 다섯명 선비의 위패이다. 그들은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선비이다.)

 

     * 언전諺傳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

       중국에 사신 가는 사람이 송시열의 이름

       으로 사주를 점쟁이에게 물으니,

     "이 사람은 생전에는 시비是非가 있으나,

      죽은 뒤에는 명성이 만대萬代에 끊이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 云 有赴燕使臣 以先生命 問於穀顚子

      對曰 此人生前終有是非 死後命流萬代"

   * 국립청주 박물관 간행 '우암 송시열'  025쪽

 

 

(오현단 옆에 있는 증주벽립 '曾朱壁立' 대자 大字 글씨 바위 돌로 우암 송시열이 서울 성균관옆 원남동에 살던 옛집 앞 큰 바위에 새긴 글씨를 탁본해 여기에 다시 새겼다.)
(오현단 옆에 있는 증주벽립 '曾朱壁立' 대자 大字 글씨 바위 돌로 우암 송시열이 서울 성균관옆 원남동에 살던 옛집 앞 큰 바위에 새긴 글씨를 탁본해 여기에 다시 새겼다.)

 

    * 성인 聖人이 내려준 아이(아명,성뢰 聖賚)

       출생하는 날 새벽에 아버지 수옹 송갑조가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고 지어준 아명(兒名)  025 쪽

     * 외모가 준수하고 비범하여 무당이 어린

       송시열을 보고는 " 이 아이 때문에 신神이 

       내리지 않는다" 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024쪽

 

(우암 송시열은 대자 大字 큰 글씨를 잘 썻다고 하며, 담양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바위에 글씨가 있다. 증주벽립 曾朱壁立은 증자 曾子와 주자 朱子가 옆에 서 있는 것으로 알고, 평소에 학문에 늘 정진하라는 경계의 말이다)
(우암 송시열은 대자 大字 큰 글씨를 잘 썻다고 하며, 담양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바위에 글씨가 있다. 증주벽립 曾朱壁立은 증자 曾子와 주자 朱子가 옆에 서 있는 것으로 알고, 평소에 학문에 늘 정진하라는 경계의 말이다)

 

    * 필자가 고등학생때 동네 노인이 은진 송씨인 내게,

      "우암 선생은 '우물에서 죽는다' 는 참언이

      있었는데 제주도에 귀양가서 100일 정도

      안치 되었다가 도성으로 취조 받기 위해 돌아

      오는 중, 전라도 땅 정읍(井邑,우물 고을)에서 

      사약을 받아 죽으니 기이하다"고 말했다

      (향년 83세)

 

( '충암 김정과 우암 송시열 선생' 각자가 보이는 근래에 세워진 다섯 현인의 호와 이름, 최종 관직을 새긴 오석 비 앞에 선 도운 송영기)
( '충암 김정과 우암 송시열 선생' 각자가 보이는 근래에 세워진 다섯 현인의 호와 이름, 최종 관직을 새긴 오석 비 앞에 선 도운 송영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심의 深衣에 복건 幞巾을 쓴 우암 송시열의 반신상 초상화 근접 확대 사진으로 국보 239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심의 深衣에 복건 幞巾을 쓴 우암 송시열의 반신상 초상화 근접 확대 사진으로 국보 239호)

 

-초상화 상단 중앙에 정조대왕이 지은 글이 있다-

 

절개와 의리는 천년세월이 흘러도 고상하여

 평생동안 나는 존중하였다.

역대 임금들도 누차 칭찬하고 높이 평가하였으니

사림 士林들인들 어느 누가 공경하지 않겠는가 ?       

종횡무진으로 내뱉는 말씀은 모두 이치에 합당하여

아름답게도 학문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천하를 다스릴 원대한 계획을 펼치지 못하고

아 !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네

한양의 사당 祠堂에

엄숙하고 고고한 선생의 초상화가 있어

유생들이 모두 참배하러 갈 때에

승지 承旨가 한 잔 술을 올린다.

 

1778년 바쁜 국정 國政에 틈을 내어 글을 짓다.

 

 

(제주 오현단 일우에 있는 귤림서원 건물)
(제주 오현단 일우에 있는 귤림서원 건물)

                       

-초상화 오른쪽 상단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자찬시-

 

자연 속에서 사슴들과 함께 지내며

초가집에서 사누나.

창문은 환히 밝고 주위가 고요할 때

주린 배 참으면서 책을 보았다네.

네 모습 볼품없고 

네 학문 텅 비었구나.

천제天帝의 진실한 마음을 어기고

성인의 말씀 어겼으니

너는 단언하건대

책벌레구나.

 

1651년 우옹 尤翁이 화양서옥에서 직접 글을 짓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다.

* 출처- 조선시대 초상화1, 번역글 장진아. 국립중앙박물관 2007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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