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GNA)안상수 국민의힘 대선 경선후보,"문제는 경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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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GNA)안상수 국민의힘 대선 경선후보,"문제는 경제다"(1)
  • 이상철 기자
  • 승인 2021.07.0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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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글로벌뉴스통신 특별취재팀)

[서울=글로벌뉴스통신] 글로벌뉴스통신 권혁중 발행인은 지난 7월3일(토) 안상수 전 인천광역시장 사무실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안상수 국민의힘 대통령 선거 경선후보는 연세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드로 윌슨 상( 미국 대통령)재단에서 상도 주었다.이 상을 받은 사람은 한국에 몇 명 안된다.

가난과 도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충남 태안군 이원면 이북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인천에 서린 국민학교(현재 서린초등학교)로 전학 왔다. ‘달동네 박물관리라는 곳에서 살았다. 

인천 중학교는 입학해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목수를 하시고 작은 어선을 운영 했다. 우직하고 건강하고 말씀이 없는 편이었다. 큰 기둥이 되었다. 오랬동안 헤어져 살았고,70세 조금 지나서 내가 인천시장을 하는 것을 보셨다.

내 기억에 420원 등록금을 못냈다.아버지는 힘없어 지원 못해라고 말씀 하셨다. 

정말 평범한 필부로 남에게 피해 안주고 그나마 기초적으로 여기까지 오는데 역할울 해주었다.

경기고등학교는 재수해서 입학했다.한번에 서울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뛰어 갔는데 늦어서 그 다음해에 입학히였다.시국이 나빠서 데모를 했다. 대학을 가려고 하는데 교장이 내가 원하는 학과에는 안된다고 했다.

시골에 어선이 있었는데 3년간 어업을 하면서 서울대학교를 졸업을 했다.대학을 다니면서 야간에 무교동 비어홀 웨이터를 2년간 했다.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는 학원 강의를 했다.입시과외 학원 그룹과외 하면서 졸업을 하고 야간에는 비어홀에 아르바이트하며 주경야독하였다.

1976년 제세산업(회장 이창우)에 취직했고 무역,건설 섬유회사인데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자금담당이사로 근무 했다. 4년 근무하였는데 1980년 회사가 도산했다.

당시에 잘나가는 회사가 대우,율산,제세가 있었는데 청년취업의 꿈의 기업이었다.

대기업이 새로 올라오는 신흥기업에 대해서 거부감으로 제세산업은 도산 했다.

그후에 동양그룹에 입사했는데, 당시에 벤처사업이라고 하는 증권,채권,창투사 퓨처스 비즈니스, 선물,카폰에서 셀룰러폰(무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정통부와 같이 참여.데이콤 지분을 받았다. 회사는 30위에서 15대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7남매중에 장남인데 소년 가장처럼 인천으로 동생들을 데려와서 막내 동생을 잃게 되었다. 어머니가 그 후휴증으로 돌아 가셨다.

어머니는 49세에 쓰러져서 55세인 1983년에 수술을 했는데 후휴증으로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와병중에 소대변을 받아 내는일도 했다.

1995년 박찬종 서울시장 후보는 당선에 실패, 박찬종 선배가 신한국당에 들어가고 YS(김영삼 대통령)에게 경제계 전문가를 영입시키자 했다. MB(이명박 대통령)는 14대 전국구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나는 15대에 낙하산 격인 계양구을 공천받아 5000표 차이로 졌다.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낙선한 후에 조순 대표가 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되었다.

1998년 한나라당은 인천광역시장 후보가 없었다.현역 의원들이 출마 안하는데 ,조순 총재,이한동 대표 시절에 인천광역시장 후보로 나가라는 당의 요청에 의해 당사로 방문했다. 경기고 선배인 조순 총재가 다음날 연락이 와서 “나는 서울시장 공천을 받고 한달만에 당선되었다.”고 말했다.

선거가 2개월 전인데 후보를 찾지 못해서 1달 미루어지고 6월에 선거가 되었다.

안상수 기사가 KBS방송에 보도되었다. 인천시 당협 위원장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5월 5일 오전 7시 신경식 사무총장이 연락이 와서 부평관광호텔에서 만났다. 6월 4일인데 물리적으로 되나 의문이었다.

안상수 37% ,최기선 DJP연합 후보로 출마 50% ,김영모 13% 득표했다.

이후에 보궐선거가 생기고 송영길과 1999년 대결해서 안상수가 이겼다. 송파지역에 고승덕을 공천했다. 고승덕(박태준 사위)이 후보에서 사퇴했다.안상수는 인천에서 이회창 송파에서 보궐선거에 출마했다.선거가 끝나면 20여명의 수도권 의원들이 DJP로 가기로 했다.

송영길과 대결에서 안상수가 15.7% 차이로 당선 되었다.

1명이 자민련 의원 (영등포 지역구) DJP연합에 큰 타격을 주었고, DJ(김대중 대통령)가 평양에서 615에 만나기로 하고 서울로 내려 왔다.

3월29일 정국이 뒤집혔다.안상수 48% , 1999년6월에 당선되었다.

인천에 방을 얻어 놓고 선거 운동을 했고, 부인은 과천 쪽에 아파트를 얻어 놓고 거주하는데 쓰러져서 뇌출혈 환자가 되었다. 결혼직후 2년정도 지나서 교수로 복직을 했는데 다음에는 수술하고 의식은 별로 없었다.

1999년8월경 방학에 처가 교수였는데 쓰러져서 서울대병원 수술후 병원과 요양원에서 11년만에 2010년9월 경 작고 했다. 무의식인 아내를 간호 했다.

특이한 경험을 가진 인생이었다. 자식도 없다. 선거란 선거를 안해본 것이 없다.

인천에는 충청인들이 많이 거주하니까 안상수는 낙선하고 10일후에 충청인들의 모임에 많이 참석했다.

다음에 인천광역시장을 출마하려는데 당에서는 후보 결정을 안해주고 이윤성이 현역 국회의원이니 출마를 하겠다 하겠다 해서 이윤성과 경선에서 안상수가 이겼다.

경기도는 손학규,인천에서 안상수가 25% 차이로 이겼다.

DJ시절에 휘니시 블로우를 때렸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과 노무현의 대결해서 노무현이 이겼다.

인천 송도 국제도시를 비롯한 인천대교가 만들어 졌다. 시민들의 기반을 닦았다.

다음번 선거에서 안상수는 송영길에게 패했다. 

2010년 송영길이 왔다. 천안함 사건이 생기고 한명숙은 전쟁론이슈를 만들어 졌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후보, 유시민은 8번 달고 나왔고 민주당은 2번인데 출마 안하고 김문수가 당선되었다.

언론조사는 3-4일만에도 뒤집힌다.웃기는 소리다. 민심은 알수 없다.

안상수는 2012년에 광역단체장이니 대통령 경선에 나가야 하겠다고 주장해서 경선 축제화에 기여를 했다.

당시에 박근혜,김문수가 대통령에 출마하는 경선에서 첨예하게 되어서 안상수가 화해 분위기를 만들고 간발의 차이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일조 했다.

겨울인 12월에 새벽에 화장실 있는 곳이 많지 않아서 패트병 실고 다니면서 볼일을 보았다.

2012년4월에 동정심도 있었는데 공천을 안주었다. 대통령 경선에 나갔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이후에는 인천광역시장 후보로 유정복을 당에서 내세우고 지원했다.

2015년 안덕수 국회의원이 중도사퇴하였고 , 김무성 대표는 철학이 경선이라서 안상수는 경선에서 이겨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년후에 이한구 위원장이 공천을 안주었다.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22석에서 1석이 모자라는 소수당이 KBS사장이 김인규가 조언해서 정론관에서 기자회견하고 조건없이 복당 선언을 했다.

당에 있으면서 자유한국당이 안착하는데 나름대로 기여 했다.

그런데 정세균에게 국회의장 자리를 내주었다.

전국위원회 의장을 하고 기독인회 회장을 하고 황교안 체제까지 비박과 친박 양측에 소통창구 역할을 했다.

황교안 대표 체제에서 김형오 공천심사위원장은 사심이 있는 특수 관계인 배준영 후보가 공천을 받았다.

당을 위해서 배준영 후보를 지원해 주었다.

계양으로 출마 하겠다하니 당에서는 미추홀 지역구를 권유해서 출마하였고, 무소속으로 윤상현 후보가 당선되었다가 현재는 재판 계류중으로 알고 있다.

 

 

요즈음 다행인것인 지금의 처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현재는 대구출신의 부인이다.

늦은 복이 있다. 최소한의 역할이 된다. 

경선 1단계가 올라가면 파이널까지가는데 자신이 있다. TV토론은 최고로 잘하고 일자리 도시를 제시할 수 있다.

6하원칙에 맞게 비즈니스 모델자체가 당장 가능한 것으로 국민들에게는 돌풍을 일으킬 수 있다.

도전정신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실패가 두렵지 않다.’ 는 인생 좌우명이다.

어떤 경우도 10전5승5패 어마아머하다.300만 인천시장을 4번 출마해서 2번 당선되었다. 시장 선거 경선 2번,국회의원 경선 1번, 대통령 경선 2번으로 현재까지 7승7패를 기록했다.

2030에 가지고 있는 박탈감, 절벽위에 서 있는 하루 앞날을 모르는 인생을 나는 길이 보인다.

문재인 정권의 실정과 코로나 문제 30-40%가 좀비기업 상태다.

중소상공인이 인생 전체를 걸고 경영하는데 어쩔수 없어서 폐업하고 이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유일한 대안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주어야 한다. 농업 중시정책 농지가 저렴한 가격으로 첨단 산업단지 배후 주거단지 만들고 200만개의 일자리와 100만채의 아파트를 1억5만원에 입주하게 전국의 주택과 소총으로 표현된다.

소총 몇 자루면 끊난다.

국민과 소통하는 툴이 더욱 확장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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