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생생하게 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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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생생하게 꾼 사람
  • 이주홍 논설위원
  • 승인 2017.07.05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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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글로벌뉴스통신]K는 농촌에서 가난한 농부의 8남매 중 네째로 태어나서 1960년대 중 후반 지방도시에 있는 상업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가정형편상 바로 대학 진학은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우선 취직을 한 후에 야간 대학교를 다니는 것으로 목표를 정했다.

 열심히 한 결과 상고를 졸업과 동시에 국내 최고 국책은행에 취직을 하였다. 그는 서울 본점 합격자 모임 교육 참석차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안에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젊은이들이 대학생활에 대한 부푼 꿈을 얘기하는 것을 들으며, 한참 공부할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슴 아픈 형편을 감내하였다.

 교육을 마친 본점 인사 담당자에게 당돌한 질문을 하였다. “저의 경우 최선을 다하여 근무할 경우 어느 정도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나요?” 담당자는 잠시 생각한 후 “아마도 차장 지위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 다닐 곳은 못 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였고. 아울러서 군 복무 끝날 때까지 학업을 포함한 역량을 키우자고 각오를 다졌다.

K는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 대학교를 가기로 결심을 하고 서울 본점 발령을 기대하였으나 고등학교 소재지인 지방도시의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유일하게 있는 2년제 야간 대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은행에서는 주변에 있는 다른 여러 지방도시에 위치한 지점 통합 체육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응원단장으로 제일 말단인 K에게 강제 배정되었다. 조직 체계상 싫다고 거절하기란 불가항력이고 성격이 내성적인 상태라 중책을 맡는다는 자체가 절망적이었다.

 용기를 갖고 응원 연습하러 강당에 모여 있는 200여명의 여자 선배 행원들을 향하여 경험이 없는 응원 구호를 외쳐 보았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끝나고 나서 어느 선배 여자 행원이 불러서 가니 응원 지휘를 코치해줄 만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그 당시는 지방의 무명인 이었지만 지금은 전국적으로 최고의 사회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L씨 이었다. 

그 덕분에 열심히 응원을 지휘하여 예상치 않은 최우수 응원 상을 거머잡은 결과를 얻었다.

 서울에 있는 4년제 야간 SK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편입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서울 본점으로 발령이 안 되어 3개월 동안 근무를 마치고 지방도시에서 서울로 통학을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고 있었다. 

해당 지점장 및 본점 인사부장과 면담을 하였으나 부정적인 답변만 있었다. 나중에 소문으로 알고 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울로 발령을 못 받으면 학업을 포기하여야 하는 절박한 지경까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들을 움직일만한 사람은 그의 상급 직책인 담당임원이라 판단을 하고 장문의 애로사항을 담아 임원의 댁으로 편지를 보낸 결과 본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일면식 없었던 임원에게 간절함과 진심이 통하였던 것이다.

 주경야독 말이 그렇지 직장 일과 학업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은 철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가면서 두 가지 일만 집중하였고 회계사 시험 준비도 병행하였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일부 학생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1개월간 고시공부를 하였으나, 갈 길이 아니라 판단하여 중단하고 하던 회계사 공부를 지속하였다.

 회계사 1, 2차 시험에 합격을 하고 졸업 후 군대 회계사 장교로 복무를 하였다. 제대 후 바로 은행을 사직하고 모 회계 법인으로 직장을 옮겨서 본격적인 회계사 업무를 하였고, 아울러서 S 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S대 원로 교수로부터 경영학과 전임강사로 추천하겠다는 제안을 받았고,K는 큰 영광이자 절호의 기회였지만 교수와 회계사 직업을 놓고 고민 끝에 회계사 업으로 결심을 하였다. 

그 결심 동기는 학문 연구와 제자들을 위한 헌신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8명의 대가족을 책임져야한다는 가족애에 경제력 확보가 우선이었다.

 회계 법인에서 맡은 업무가 외국인 동료와 외국회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영어 사용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대화와 모든 업무가 영어로 하여야했다. 영어회화 실력이 절실하였다. 그 당시 영업 학습 도구로는 요즘같이 편리한 MP-3나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 유행하였던 테이프로 구동되는 워크맨 이라는 기기였는데, 출퇴근 시간을 포함하여 끼고 다니며 1년 여 동안 영어학습에 몰두한 결과 업무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회계사 업무 3년여 시간이 흐르면서 직업상 숫자만 가지고 하루 종일 일하여야하는 메너리즘에 질려서 다른 직장으로 이직 결심을 하고 사직원을 제출하였으나 상사의 만류와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어 없었던 것이 되었다.

 마음을 다잡고 이왕 전문가가 되려면 제대로 하자고 재출발 하였다. 교수의 길을 포기하였지만 전문분야인 세무경리 분야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강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강사 초반기에는 경험이 없었으며 지명도가 낮았기 때문에 큰 교육기관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지방의 대학교에서만 간혹 요청이 오는 정도이었다.

 고심 끝에 지인의 소개로 우리나라 교육연수원 중 손 꼽히는 J연수원 교육담당자를 면담하였으나 초보자에게는 맞길 수 없다하여 거절당하고 명함만이라도 받아 달라 사정하여 몇 달 후 J연수원 담당자로부터 4시간 강의를 요청 받았다. 모 유명교수가 사정상 결강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보충하는 것 이었다. 그렇지만 기회라 생각하고 성심성의껏 자료 준비와 강의를 하였다.

 그 후 또 다시 강의 요청이 왔는데 이유를 파악한 결과 첫 강의에 대한 교육생들 평가 결과가 1위로 나왔기 때문에 내규 상 정식강사로 결정되어 고정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이를 계기로 다른 교육기관, 대학교, 방송, 기업체 등 강사로 확대가 되어 다방면에서 강의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또한 그동안 소속되었던 회계 법인에서 독립하여 별도로 회계 법인을 설립하여 외부회계감사, 기업 세무업무, 컨설팅 등을 수행하며 경영지도사 역할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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