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천 前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의 '도전정신'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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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천 前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의 '도전정신'특강
  • 권혁중 기자
  • 승인 2015.05.08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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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3기 CEO최고위과정

   
▲ (사진제공:윤현)권혁중 글로벌뉴스통신 발행인과 나눔CEO최고위과정 수강생들이 정운천 前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특강을 듣고 기념사진
【국회=글로벌뉴스통신】대한민국 국회나눔포럼(사무총장 윤현)은 5월 7일( 목) 오후 7시 국회의원화관 2층 제3세미나실에서 정운천 前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강사로 초청하여 나눔3기 CEO최고위과정을 개최했다.

서재균 부원장의 사회로 포럼은 시작되었으며 정운천 前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강의내용은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정운천 前 장관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멘토)라고 운을 띄운 정운찬 전 장관의 주제는 ‘도전정신’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시작은 각설이 타령이었다.

얼 시구시구 들어간다 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에서 시구가 화살 시(矢)에 입 구(口)를 합하면 알 지(知)가 되어 지화자 조을시구(知化者 鳥乙矢口)를 만들어냄으로 각설이 타령의 주제는 봉황의 때와 기러기의 때 즉, 봄과 가을의 때를 구분하여 아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 충무공의 23전 전승 비결이 바로 공격과 수비의 때를 알았기에 때문이라 하면서 지식의 으뜸이 때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 때를 알고 행하는 것의 마지막은 신뢰로 마침을 이루는 소통이라고 설명했다.

정치는 소통이며 그 소통은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하며,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받는 근본은 공동체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도덕과 예절(moral)이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그 도덕과 예절을 상실했다.

도덕과 예절이 없는 사회는 정확한 지식이나 근거도 없이 큰소리로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하여 마주하는 상대를 무너트리려 한다.

그것이 왼손 모르게 독립운동을 한 분들마저 흠을 잡고 만들어진 친일 인물이야기나 광우병 파동이다.

그런 정치적 이야기에 국민의 신뢰는 없다. 서구에서는 이미 그 원인을 밝혀 광우병을 잠재우기 시작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서는 그를 확대생산하여 허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정치이야기의 마지막에 모함에 의해 끌려가 모진 고문에서도 원망불평하지 않았던 이순신을 생각하며 본받은 것 역시 없다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서 희망을 창출하는 도전정신이라 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순신의 그 정신을 본받아 살아 온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는 고려대 농과를 졸업했다.

그는 무엇을 할 때 최고나 최저 둘 중 하나에서 시작하라는 인촌 김성수의 가르침 중 최저의 장소인 해남 땅 끝 마을에서 자신을 위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1982년 고산 윤선도의 후손에게 땅을 임차하여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시험재배 되기 시작된 키위농업에 뛰어들었다.

시작한지 4년 만인 노태우정부시절 농산물수입자유정책에 의해 고비를 맞았다.

입자유화로 생긴 국산 가격의 폭락으로 인한 키위 판매의 문제에서 함께하는 농업동지 500여명이 하늘만 바라보는 그 모습에 답이 없어 그는 자살을  생각하며 바닷가로 나갔다.

하지만 근처 지역인 명량의 혼이 그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그는 나머지 열 두 척의 배로 명량의 승전을 만든 이순신의 지도력과 정신의 불을 마음에 피웠다.

그는 동지 농민들을 설득하고 서울로 올라와 현대 삼풍 뉴코아 등 백화점 구매담당들을 만나 설득을 시작했다.

죽음에서 살아나온 투사의 모습에 질렸는지 그의 설득에 생각해보겠다고 했던 백화점에서는 답이 없었다.
해남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뉴코아백화점으로 돌아가 설득을 하였고 판매는 아니었지만 결국 판매금액의 20%를 지불한다는 약정 하에 매장을 얻었다.

우여곡절 끝에 예상치보다 수십배의 매출을 올리면서 백화점 지급률도 십분지 일 수준으로 낮추고 말 그대로 서울 대전 대구 부산까지 찍고 또 찍으며 성공적 판매성과를 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해남 참다래 영농조합을 세우고 신지식농업인을 양성하는 등의 사업을 벌였다.
이후 그는 일본에서 발견한 포장된 고구마에서 생각을 얻어 고구마의 저장과 포장에 관심을 보인다. 고구마는 물로 씻어도 안 되고 장기간의 저장도 안 된다.
하지만 그의 도전정신은 결국 보통의 수익보다 7배의 수익을 낳게 된다.

이를 두고 장원석 前 국민성공시대총재는 “무술이가 장희빈으로 바뀌었구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의 도전정신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농업기술보다 선진기술을 보유한 네덜란드의 농법방식을 배워 조직과 규모 등을 합성화 시켜 공장과 농장과 매장을 하나로 묶었다고 했다.고대부터 내려온 생산위주의 농업은 말 그대로 1차 산업일 뿐이다.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중간상인들이 끼어들어 생산자의 수익은 미미했었다.
그 생산 위주의 농업을 생산물의 판매에 더하여 농산물을 가공하여 별도의 식품으로 상품화 하여 판매까지 하게 되는 복합농업으로 획기적으로 혁명을 이룬 것이다.

그러한 도전 정신은 그 하나에만 머물 수 없었나보다!

그는 2007년 이명박 대통령후보진영에서 실시한 안국포럼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서 농업의 발전을 위한 지원을 주장하던 다른 농민단체 대표와는 달리 그렇게 농업을 살리자고 하는 것은 마약주사와도 같다 하며 여러분들의 그런 요구가 농촌을 망하게 한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그리고 농산품이 식품으로 가공되어야 하므로 단지 농림부가 아닌 농업식품부로 개명하여야 한다고 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정 전 장관은 그 말을 들은 이명박 후보의 좀 작은 눈이 엄청 커졌다고 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결국 그는 이명박 정부의 초대 농업수산식품부 장관이 되었다.

그렇게 장관이 되고도 그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농어민을 또 하급관리를 주인처럼 생각하는 행정장관이 되었다.

그의 주인관에는 의무와 책임완수 후 권리소유가 있었다.

하지만 취임 몇 달 후 대한민국을 흔든 무지와 허위에서 시작된 광우병 파동으로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내어놓았다.

회상장면에서 정 전 장관은 장관시절 농민단체를 주인처럼 여기고 예우해 주지 않았다면, 광우병 파동에 그 농민단체가 함께 일어났다면, 아마도 그 파동의 여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한민국에게는 치명적 사태까지 불러 일으켰을 것이라고 했다.

결론으로 정 전 장관은 그 농민단체가 자신을 믿어주고 나서지 않았던 것이나 퇴임이 결정 된 이후에도 차관 이하 전 공무원이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시도 마지막까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고,진퇴의 때를 알았기 때문이며 그 중심에 서로에 대한 예가 존중되었음을 강조했다.

그것이 예절과 도덕이라는 모랄이 바탕이 되는 도전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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