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과 김천고보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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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과 김천고보 설립
  • 송영기 기자
  • 승인 2023.11.15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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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남한산성 내에 있는 만해 기념관  전경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남한산성 내에 있는 만해 기념관 전경

[서울=글로벌뉴스통신]  만해 한용운과 김천고보(김천고) 설립

 

얼마전 경기도 여주를 가는 길에 세계유산 남한산성을 올랐는 데 그곳에 만해기념관이 있었다. 함께 간 친구와 들려 전시장을 관람하던 중 마침 오랜만에 왔다는 전보삼 만해기념관 관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개인 명함 약력에 경북 김천고 출신임을 알고 관심을 가지고 친근히 다가오며,그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김천고보 설립과정에 영향을 미친 일화가 있다며 만해와 최송설당에 대해 잠깐 설명을 했다.

당시 김천고보 설립자 최송설당 여사는 고종황제의 계비 엄귀비가 낳은 영친왕의 보모로 무교동에 대저택이 있었고, 총독부 관리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은 여장부였다. 만해는 성북동 골짜기 심우장에서 수행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있던 때 였다. 불교 독실한 신자로 전국 유명사찰에 시주 많이 하는 큰보살로 저만금을 가진 여사는 해인사에 전재산을 희사할까 고심하던 차라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만해의 성북동 심우장으로 찿아가 이차 저차한 정황을 말하며 자문을 받고자 찿아 왔다고 한다.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 기념관 앞 정원에 있는 만해 한용운 흉상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 기념관 앞 정원에 있는 만해 한용운 흉상

 

독신으로 슬하에 자식이 없고, 나이도 70여세가 되어 극락왕생을 빌겸 큰절에 보시하여 전재산을 정리할 의도였던것이다.

그랬더니, 만해는 펄쩍 뛰며 '해인사는 왜놈 밀정들 소굴(?)'인 데, 그곳에다 전재산을 투척하면 절대 안된다. 차라리 장차 이 나라를 위해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육영사업에 큰 재물을 쓰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부각되지 않은 거의 처음 듣는 말이라서 김천고 설립에 관한 몇가지 책을 살펴보았다.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기념관에서 제작한 '만해와 그 사람들' 2004년 10월 16일 전시회용 특별기획전 책자 표지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기념관에서 제작한 '만해와 그 사람들' 2004년 10월 16일 전시회용 특별기획전 책자 표지

 

(1) 송설60년사(1991년판)에는 보편적으로 최송설당의 가문과 내력,효심,정재쾌척(靜財快擲) 학교설립, 재단 수임 다섯이사(財團受任 五理事)등에 대한 칭송과 설명이 주된 것이었고,비사(秘史)와 같은 이야기들은 비교적 조명이 되어 있지 않다,

(2) 최송설당기념사업회가 엮은 최송설당집Ⅱ(2005년판)에는'여사가 환갑이 되던해 최후의 낙을 누리신 모부인 정씨는, "이제 네가 할 일은 네 재산을 교육사업에 바칠 일이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80세에 천명을 다해 눈을 감으셨다...최여사는 선비(先妣)의 유언을 지켜'라는 글이 있다 (329쪽)

따라서 김천고보 설립에 최송설당의 어머니 정씨의 유언과 평소 송설당의 큰뜻으로만 공히 알고 있는 부분이다.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선사 열반 60주기 만해와 관련된 60명 인사들 중에 포함된 최송설당 여사. 궁중 큰 상궁이 쓰는 족두리를 머리에 착용한 최송설당의 캐리커쳐 모습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선사 열반 60주기 만해와 관련된 60명 인사들 중에 포함된 최송설당 여사. 궁중 큰 상궁이 쓰는 족두리를 머리에 착용한 최송설당의 캐리커쳐 모습

 

(3)최근 김천 중고등학교 송설 동창회보 Vol 80에 연재글 제1화 '고덕환,이한기를 아십니까? -부제 송설학원의 태동'(최동현 작가, 제32대 송설 총동창회장,송설당교육재단이사) 게재글에 비로소 학교설립 조연(助演)들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즉 오늘날 송설학원(松雪學園) 잉태과정의 주연(主演)은 당연히 최송설당, 조연은 이름조차 잘모르고 있다며, 설립

발상에 당시 재산관리 법무사 이한기,고덕환과 이인,만해선사등이 있다고 거명하였다.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에게 추서된 건국공로 훈장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에게 추서된 건국공로 훈장

 

(4) 아울러 동 송설회보에 동시에 게재된 법보신문 내용에 "엄비의 도움으로 재산을 운용해 상당한 재물을 모을수 있었다.이 재력을 기반으로 1912년 무교동에 '송설당' 이란 호를 딴 큰집을 짓고...자녀가 없었던 송설당은 전재산을 해인사에 보시하는 방안을 고민..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만해스님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원력을 굳건히 했다는 후문이다."라는 기사를 보면, 이제 한용운 애국 스님이 김천고 설립에 결코 무시 할수 없는 인연이 닿아 있음을 알수 있겠다.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 기념관에 전시된 만해 육필 원고와 불경책자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 기념관에 전시된 만해 육필 원고와 불경책자

 

(5) 또한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2004년 10월 특별기획전 「만해와 그 사람들」

책자에는 전보삼 만해기념관 관장의 직설적 언급과는 좀 다르지만 최송설당

에 대한 설명이 아래와 같다.

'육영사업가...송설당은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불교에 관심이 많아 많은 재물을 불사에 보시하였다. 이러한

소문에 사찰의 시주금 요구가 끊이질 않았다.하루는 만해를 찿아와 해인사

불사에 시주금을 내느냐 아니면 사찰을 하나 건립하여 원찰로 삼느냐하는

문제를 상의하였다. 만해는 두가지 방법 다 옳지 않다고하였다.절이 많은데

하나를 더 추가한다는 사실이 틀렸고,또 해인사는 큰절인데 그곳에 왜 시주

하느냐고 하였다.그러면서 대안으로 교육사업에 쓸것을 제시하였다.듣고보니

과연 옳은 고견이었다. 만해의 의견대로 송설당은 1930년 2월 25일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등 전국 일간지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할 취지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고,1931년 2월 5일 전재산을 희사...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로 발전 되었다.건학이념은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

을 함양하라" 이다 라는 글을 보면  전보삼 관장의 그 정황 설명이 이해가 간다.

이 점은 앞으로 더욱 새로운 조명과 현창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둥근달 속에 있는 계수나무 베어내고, 나라꽃 무궁화를 심자는 만해의 시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둥근달 속에 있는 계수나무 베어내고, 나라꽃 무궁화를 심자는 만해의 시

 

(6) 그후 조선총독부는 여사의 인문계고등학교 설립 인가 원서에 대해서

'실업학교'로 변경 방침이었다가, 최 송설당의 매우 강경한 태도에 눌려

총독부는 동경 문부성의 내의를 얻어 1931년 2월 9일 재단법인 송설학

원의 등록이 완료, 3월 17일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고 한다.

일찌기 불도에 귀의하여 전국 유명 대찰에 불공과 시주를 골고루한 활불

(活佛)로 사시다가 김천고 뒤 송정(松亭)의 정걸재(貞傑齋)에서 1936년

6월 16일 81세에 화순(和順) 최씨 고부할머니는 천수를 다했다.

아뭏튼 경북 김천에서 화순 최씨 집안의 세딸 중 장녀로 태어난 최송설당

(1855 -1939)은 사학설립자로,근대 여성계의 대표적 헌신자로,또한 궁중 여류

시인으로 주옥같은 한시 259수와 국문가사 50편을 남겨 지금 읽어도 그 시상이

맑고 고결하여 성품과 인품이 여장부로 공경 받을 만한 분임을 알수 있다. 여기에

한용운 선사의 오도송과 함께  송설당의 2편의 한시를 올려 그 인물됨을 다시 본다.

       

       한강을 바라보며(望漢江)

                   최 송설당

 

     한 돛배 막 가니 한 돛배 오고

     강상의 여행배 하루에도 몇 번이던가

     가련쿠나, 강산은 무한히도 좋은 데

     바삐 가고 바삐 오며 저같이 재촉하는 가

 

 

      낚시하는 늙은이 (漁翁)

                 최 송설당

 

  비가 씻은 가을 강물 더욱 맑은 데

  낚시하는 늙은이 배 가볍게 저어가네

  다만 세속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언제나 안개낀 물결 마음대로 오간다네

 

 

             오도송(悟道頌)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서

             만해 한용운(1879-1944)

 

     남아 발길 닿는 곳 거기가 고향이거늘

     나그네 어찌 긴긴 나날 향수에 서러운고

     한소리 할로 삼천대천세계 타파하니

     눈속에 붉은 복사꽃 흩날리고 있더라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飛*)
     *紅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 한용운 스님 입상 사진 앞에서 중앙에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 왼쪽은 시조시인 송영기 기자, 오른쪽은 오호현 시인)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만해 한용운 스님 입상 사진 앞에서 중앙에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 왼쪽은 시조시인 송영기 기자, 오른쪽은 오호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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