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희 칼럼)한국 성씨의 숨겨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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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희 칼럼)한국 성씨의 숨겨진 비밀
  • 한창희 논설위원
  • 승인 2023.1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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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글로벌뉴스통신DB)한창희 논설위원
(사진:글로벌뉴스통신DB)한창희 논설위원

[서울=글로벌뉴스통신]한국 성씨(姓氏)의 숨겨진 비밀

조선초기만 해도 성씨(姓氏)를 가진 양반은 10% 정도였다. 조선중기 양반계급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부터 평민들도 각 씨족 별로 구전해오던 자료를 갖고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집성촌을 이루지 못한 유랑민이나 원래 천민은 성씨도 없이 돌쇠, 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의 이름으로만 불리웠다.
 
1909년 일제는 호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를 호적에 올리게 했다.
그 때 가장 인기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씨, 이씨, 박씨"등 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성이 더욱 흔해지게 된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이들이 신청하는 대로 유명 성씨의 호적을 갖게 해 준것은 조선 양반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다. 또 노비를 양민화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리기 위한 식민통치술의 일환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성씨는 286개인데,김(金)씨는 우리 나라 인구의 21.6%인 992만 명으로 제일 많다. 이(李)씨는 그보다는 적은 14.8%로 679만 명으로 조사됐다. 박(朴)씨도 8.5%로 389만명 정도 된다. 우리나라에 특정 성씨가 이상할 정도로 많은 것은 1900년대 초 일제가 호적법을 시행할 때 양반이 되고싶은 많은 사람들이 '특정 성씨로 선택의 쏠림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 때 “전 국민 성씨 가지기” 정책을 폈다. 국민 모두가 성씨를 만들어 등록토록 했다. 이 때 일본인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를 만들어 등록했다. “田中, 中村, 松下...” 등 다양하게 창씨된 성씨가 순식간에 8만 여개나 늘어났다.

일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호적법을 시행하며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게 했는데 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 등 민초들은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들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동네 양반들의 양해를 받아 그 양반의 성씨를 관(官)에 신고했다. 심지어 김좌진 장군의 식솔들도 안동 김씨로 신고했다. 

이때 특정 성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특정 성씨가 20%를 넘는 경우는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레 이뤄졌다.

우리나라 옛조상들은 원래 성씨가 없었다.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일부 고위 귀족들이 중국을 본따 성씨를 만들었을 뿐이다.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서 왕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성씨 만들기가 성행했다. 

심지어 왕족들은 이미 수백년 전에 사망한 조상에게도 '박혁거세' 처럼 성씨 '박'을 만들어 붙였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일제가 호적법을 시행하며 처음으로 성(姓)을 갖게 됐다. 이런 사실은 철저히 “가문의 비밀”이다.

성씨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우리 백성들은 양반제도가 비록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 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과 합방후 조선인들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한다면서 실제는 차별이 너무 심했다. 조선인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성명에서 출신이 확연하게 드러나니 일제도 차별을 없애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인들도 '차별없이' 군인으로 전쟁에 내보내야 겠다는 발상에서 일본식 창씨(創氏)개명을 착안한다. 

일본과 똑같이 창씨개명만 하면 어차피 얼굴 생긴 것도 비슷해 조선인들을 차별대우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논리다. 그대신 조선 청년들도 군대에 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1940년대에 대대적으로 창씨(創氏)개명을 단행한다. 일본인과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들이 호응할 것으로 믿었던 일제는 조선인들의 '창씨개명 반대'에 당황했다.

반대 이유가 “어떻게 양반 성(姓)을 버리고 근본도 없는 성씨(姓氏)를 만드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상민들이 새로 얻은 '양반 성씨'를 '일본인과 차별대우 해소' 보다 더 중시여겼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호응치 않는 이유, '양반 성씨에 대한 자긍심'을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일제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 붙였다. 이때 林, 柳, 南씨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됐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청년들을 일본군으로 차출해 전쟁의 총알받이로 이용했다.

한국인의 대부분이 성씨를 갖는 과정에서 애환이 너무 많았다. 
이제는 모두가 양반의 후손이 됐다. 자기 성씨에 대해 자긍심을 느낀다. 

전 세계에서 '종친회'가 가장 활기를 띠는 곳이 우리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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