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방내리·모량리 일원,통일신라 도시유적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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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방내리·모량리 일원,통일신라 도시유적 확인
  • 권혁중 기자
  • 승인 2013.06.1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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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 박승규)은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의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모량리 일원의 경주 동해남부선 연결선 건설공사 구간 내 유적에 관한 현장설명회를 오는 12일 오후 2시 발굴조사 현장에서 개최한다.

  전장 1km에 이르는 철도노선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도로, 우물, 담장, 적심(積心)건물지, 제방시설 등을 갖춘 도시유적이 확인되었다.

  도로는 그 폭이 5~8m로 총 10여 곳에서 확인되었으며, 모두 남-북, 동-서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도로에 의해 구획된 하나의 방(坊)은 120m×120m의 규모로, 방 내에는 담장과 우물, 적심건물지로 구성된 가옥이 조성되어 있었다. 또 하천(大川)과 인접한 북쪽경계 지점에서는 길이 30m(동서로 계속 연결됨), 폭 5m의 석축제방이 발견되어 도시의 경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로는 다수의 수막새(蓮花文막새, 獅子文막새), 암막새(飛天文막새)를 비롯하여 고배(高杯), 인화문(印花文)토기, 청동접시, 수레굴대[車軸], 탑상전(塔像塼), 치미(鴟尾, 용마루 장식기와),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유물들 중 우물주변 진단구(鎭壇具,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기 위해서 지하에 묻는 매장품)로 이용되었던 청동접시의 바닥에서 “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유적의 중심 시기는 도로에서 출토된 유물에 의해 8세기경으로 판단된다. 도로와 건물지의 중복이 많고, 건물 조성 시 이용된 축성토에서 5세기의 유물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5세기경부터 마을이 조성되어 6세기, 7세기를 거쳐 8세기경에 경주왕경과 같은 도심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지역 일대는 신라 6부의 하나인 모량부(牟梁部)의 옛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신라왕경으로 진입하는 서북방면의 주요 교통로이다. 조사지역과 인접하여 사적 제43호인 ‘경주 금척리 고분군(慶州 金尺里 古墳群)’이, 북쪽으로 5km 지점에는 사적 제25호인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이 위치하는 등 역사·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곳이다.

  이번 조사의 가장 큰 성과는 경주시내 왕경지역 바깥인 방내리·모량리 일원에서 도로에 의해 방형으로 구획된 도시를 확인한 것이라 하겠다. 방제(坊制)에 의한 도시의 조성이 그동안 경주시내에서만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경주시내 외곽지역에서 방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신라 왕도의 발달사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은 이번 발굴조사 결과가 문헌(三國遺事 辰韓條 : “신라의 전성기엔 京中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金入宅이 있었다”)에서 기술된 1360방과 360방(현재의 통설)의 차이를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또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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