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GNA) 김태진의 서사로 읽는 시문학 살롱(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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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GNA) 김태진의 서사로 읽는 시문학 살롱(8)
  • 김태진 기자
  • 승인 2023.04.1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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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글로벌뉴스통신] 문학평론가 김태진의 서사로 읽는 시문학 살롱, ‘중얼거림’

 

「중얼거림」

 

환한 대낮에 잃었던 그 길

밤이면 내 홀로 헤매는 그 길 !

 

들끓는 사람 틈 노치인 그대

어쩌다 꿈에나 만나는 그대

 

내 어이 말하랴 애틋한 그를

나 혼자 그리다 시어질 그를

 

고이고 붓나니 쌓이는 시름

끓이고 태우다 자저 질 시름

 

낮밤에 못 잊는 불멸의 영상(影像)

큰 번개 치는 날 만나리 만나리.

 

- 수주 변영로(1898〜1961), 중얼거림,「思想界」, (1957. 9)

(사진: 김태진 인문학사진) 변영로 선생이 찾던 '은성주점'을 재현한 명동백작
(사진: 김태진 인문학사진) 변영로 선생이 찾던 '은성주점'을 재현한 명동백작

수주 변영로는 1898년 봄, 지금의 종로구 가회동인 서울 맹현에서 아버지 변정상(卞鼎相)과 어머니 강재경(姜在卿)의 삼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10년 서울 재동보통학교를 거쳐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 교사와의 갈등으로 1912년 퇴학당한 뒤 만주 안동현을 떠돌았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월반 수료하고, 모교 중앙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며, 이때 명예 졸업을 하게 된다. 1918년에는 《청춘》지에 영시<코스모스>를 발표하고 1919년 3·1독립선언서를 번역. 해외 발송했으며, 1920년에는 《폐허》 동인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신천지》에 〈소곡 5수〉를 발표한 데 이어《신생활》·《동명》 등에 여러 작품을 발표했고 1924년, 첫 시집 《조선의 마음》으로 한국 문단에서 주목받게 된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폐허》동인이면서도 1920년대의 감상적이며 병적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를 중시했다. 당시 《백조》계열의 낭만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한 탓에 서정성과 민족정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후기인 30〜40년대에도 이어졌다. 1924년 평문관(平文館)《조선의 마음》의 표제시로, 나라를 잃은 애처로운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민족적 울분을 그대로 토해낸다. 시조〈고운 산길〉(《시문학》 2호, 1930)·〈곤충 9제〉(《문장》, 1941)를 통해 더욱 정제되고 세련된 표현을 다양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민족 시인의 길을 걸었던 수주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고전문학 부흥운동을 시조창작으로 구체화해갔다. 1933년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주간, 《신동아》 편집장 등을 역임했고 1939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한다. 해방 후,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했다가 1955년 〈불감(不感)과 부동심(不動心)〉이 '선성모욕'(先聖侮辱)이라는 필화사건으로 사직한다.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그 무렵 수필을 많이 썼고 '술 취해 살아 온 40년'이란《명정 40년》(1953),《수주수상록》(1954)을 냈다. 특히, 《명정(酩酊) 40년》은 그의 솔직한 심정과 풍자·해학·기지가 담긴 수작이다. 1959년 《수주시문선》(1959) 출간한 변영로는 1961년 3월14일 서울 신교동 자택에서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수필집 《명정반세기》(1969), 《차라리 달 없는 밤이 드면》(1983) 등이 나왔다.

선생의 묘는 본적이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인 연고로 부천시 고강동 산63-7 밀양 변 씨 문중 선산에 있다. 그의 묘소 앞에는 전기(前期) 작 <생시에 못 뵈올 임>(《폐허 이후》, 1924)을 새긴 수주 변영태 선생 기념비가 있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 꿈에나 뷜까 하여/ 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 (중략) 다시 못 뵈올 그대의 고운 얼굴,/ 사라지는 옛 꿈보다도 희미하여라.//

'생시에 못 뵈올 임'은 누구일까? 21년 늦은 터울의 만해의 님과도 닮은꼴인가? 그의 서정성이 민족적 서정과 맞닿아 있다고 볼 때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리라. 후기에 계속된 시작(詩作)은 1957년 이‘중얼거림’으로 끝을 맺는다. 님을 향한 끝없는 간구, 민족혼의 되새김이 아닐 수 없다. 향배(向拜)올린다.

오늘 선생의 중얼거림을 따라가다 보니 아흔일곱 동자승 같은 아버님과도 닿아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비록 말씀은 없으셔도 나는 안다. ‘똑바로 살아라’고 부처님 같은, 스님과 똑같은 말씀을 중얼거리고 계시다는 것을... 그리하여 “늘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所懷伊人)라며 부자가 옷을 홀딱 벗어두고 비를 맞으며 서로 말없이 춤을 춘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춘다. 그리하여 허공을 향하던 중얼거림은 어설픈 동작과 함께 멈춰 선다.

문득 수주선생의 40년 세월, 술에 취해 명정상태로 살던 세상 은성술집에서는 수주 변영로 선생이 주변의 문인들에게 "주량이 어느 급인가?" "아직도 형편없습니다." "그러면 애주?" "그 급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그러면 뭘 했어?" "죄송합니다." 라는 당시의 일화가 있다. 어느새 수주 변영로도 술병으로 세상을 뜨고 술은 못 마시는 대신 담배는 지독하게 피워대는 공초선생 오상순도 조계사에 늙고 병든 몸을 의탁했다. "수주는 가고, 또 공초가 가고!"

암울했던 시절, 숱한 경계를 무심 왕래한 시인으로서는 필자의 허튼 이야기 하나 덧대어 본들 무슨 대수랴? 하고는 짐짓 짐작하고는 “내 어이 말하랴 애틋한 그를 나 혼자 그리다 시어질 그를” 이라며 잔을 들어 중언부언하는 듯하다. 반가운 봄비라는 데, 짙은 황사 비 맞으니 더 암울할밖에 ... ... 아! 세상과 더 살가워지지 못한 나의 심사는 마치 팥죽색같이 변한 멍 자국으로 남고 말았어라. 중얼중얼

문학평론가 김태진 법학박사는 동아대학교 법무대학원 교수, 한국헌법학회 수석부회장, 국가기관 과거사 진실위원회 사무처장, 국정원 원사편찬실장 등 역임, 공직 30여년 퇴임 후 현재 헌법기관 민주평통 자문위원, 한반도미래전략연구소 소장, NGO 붓다를 사랑하는 사람들 공동대표, 사단법인 만해사상 실천연합 상임감사, 한국공무원불자연합 고문, 한국문인협회(문학평론가· 수필가), 글로벌뉴스통신 문화예술위원장으로 활동 중, 주요저술로는 헌법스케치(1997), 국가기관 과거사 정리 백서(공저 2007), 호국 인왕반야경(공저 2015), 論 아득한 성자(2021), 不二로 만나다 -만해 한용운, 만악 조오현 시세계 (근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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