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촉석루 의기사 - 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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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 의기사 - 논개
  • 송영기 기자
  • 승인 2020.10.11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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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글로벌뉴스통신]

 

(섬섬옥수 열 손가락에 반지로 깍지 끼고, 왜장을 안고 푸른 강물에 빠져 순절한 논개의 영정, 부분사진)
(섬섬옥수 열 손가락에 반지로 깍지 끼고, 왜장을 안고 푸른 강물에 빠져 순절한 논개의 영정, 부분사진)

 

        

          촉석루 의기사- 논개

                        송 영 기

 

남강뒤  넓은지붕  높은누대 마루올라

앉아서  맑은바람  흐르는 땀 식히고

굽어본 푸른강가에  솟은의암 말이 없네

 

승냥이 울부짖고  의인 모두 스러져간

바위에 섰던 가인(佳人) 어디에서 볼수있나

가락지 단단히 끼고 사당안에 홀로섰네

 

        (都雲 宋永起 /시조시인,서울)

 

(19세에 순절한 논개로 인해 진주 남강과 의암 바위는 이름이 더욱 빛난다)
(19세에 순절한 논개로 인해 진주 남강과 의암 바위는 이름이 더욱 빛난다)

 

  (註) 慶南 晋州 矗石樓 義妓祀 ,南江 義巖 佳人

     義妓 論介 朱氏 전남 장수출신(1574 -1593)

     선조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2차싸움

     에서 군,관,민 7만명이 왜군에게 모두 전사

     하자,의기 논개는 적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남강 깊은물에 빠져 순절하니

    19세 였다.

  

(나라를 위한 논개의 충절에 대하여 진주 관.민,유림의 수차례 거듭 올린 상소가 경종임금 때 마침내 받아들여져 사당을 짓고 제를 올릴수 있게 되었다)
(나라를 위한 논개의 충절에 대하여 진주 관.민,유림의 수차례 거듭 올린 상소가 경종임금 때 마침내 받아들여져 사당을 짓고 제를 올릴수 있게 되었다)

 

(지수문 指水門 들어서면 의기사 義妓祀 사당안에 열손가락에 가락지 낀논개가 의연히 서있고, 필자가 들어가서 참배한다)
(지수문 指水門 들어서면 의기사 義妓祀 사당안에 열손가락에 가락지 낀논개가 의연히 서있고, 필자가 들어가서 참배한다)

 "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그 여인 어찌 죽을곳을 찿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오,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

    (정식鄭栻 1683-1746의 논개 비문碑文 시詩)

 

(영남제일형승 현판 -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 晋陽溪山勝致嶺南第一 : 李仁老의 破閑集)
(영남제일형승 현판 -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 晋陽溪山勝致嶺南第一 : 李仁老의 破閑集)
(촉석루는 남장대 南將臺로 전시에 장수의 지휘본부이고, 평시에는 향시를 치르거나 선비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사용했다)
(촉석루는 남장대 南將臺로 전시에 장수의 지휘본부이고, 평시에는 향시를 치르거나 선비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사용했다)

 

(촉석루 矗石樓는 창원 촉석산에서 돌을 운반해와서 기둥을 만들어 그 이름을 얻었다는 설과, 南江남강 주위에 삐죽삐죽한 큰돌이 많이 서있다하여 누각이름을 지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촉석루는 의기 논개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촉석루 矗石樓는 창원 촉석산에서 돌을 운반해와서 기둥을 만들어 그 이름을 얻었다는 설과, 南江남강 주위에 삐죽삐죽한 큰돌이 많이 서있다하여 누각이름을 지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촉석루는 의기 논개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사진촬영 : 글로벌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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