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GNA) 몽오산인 김종수 유고집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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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GNA) 몽오산인 김종수 유고집 발간
  • 김진홍 논설위원장
  • 승인 2021.12.06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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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에서 1,2권으로 유고집 출간
(사진제공: 종손인 김인구작가) 몽오 유고집 1.2권 모습.
(사진제공: 종손인 김인구작가) 몽오 유고집 1.2권 모습.

[의왕=글로벌뉴스통신]몽오(夢梧) 김종수 유고집 1, 2 편이 한국 고전번역원에서 출간 되었다. 몽오집은 몽오 김종수(좌의정, 정조시대)의 유고집이다. 김종수 사후 정조의 명에 따라 그의 문집이 수집되었으나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수집만 되었을 뿐 문집으로 발행되지 못하고 세상의 변화만을 기다리다가 1912년에 이르러 비로소 간행본으로 발행될 수 있었다.

이후 다시 100여년이 지나 한글 본으로 우리 곁에 올 수 있었다.

몽오 김종수 (金鍾秀, 1728~1799)의 본관은 청풍 (淸風 ), 자는 정부 (定夫 ), 호는 몽오 (夢梧 )· 솔옹 (率翁 ), 시호는 문충 (文忠 )이다 . 부친은 시직 (侍直)을 지낸 김치만 (金致萬 )이고 , 조부는 호조 참판을 지낸 김희로 (金希魯 )이고 , 조부는 우의정을 지낸 김구 (金構 )이고 , 고조부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김징 (金澄 )이다. 모친은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풍산 홍씨 (豐山洪氏 ) 홍석보의 딸이고 , 처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해평 윤씨 (海平尹氏) 윤득경 (尹得敬)의 딸이다.

(사진:김인구 작가) 몽오 김종수의 생전의  모습(영인본)
(사진:김인구 작가) 몽오 김종수의 생전의  모습(영인본)

그는 정조 때의 명신이다. 동덕회 멤버로 정조의 등극을 도왔으며 정조가 그의 초상화에서 썻듯이 문형좌상 (文衡左相 )으로서 올곧은 인생을 살다가 산인 (山人)으로서 생을 마감하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몽오 김종수는 2009년  2월 정조어찰첩의 발견으로 영·정조 시대가 새롭게 재평가되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문화적 상황 전반이 재인식되면서 다시금 조명 받게 되었다.

정조어찰첩에는 ‘대사헌의 무리가 백 번 상소한들 몽상의 한 마디만 못할 뿐이다.’ 라는 정조의 한 마디 뿐만 아니라 정조가 그를 어찌 생각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사진:김인구작가) 의왕시 왕곡동 입구의 표지석 모습(이곳은 청풍김씨 집성촌)
(사진:김인구작가) 의왕시 왕곡동 입구의 표지석 모습(이곳은 청풍김씨 집성촌)

몽오 김종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화성성역의궤의 편집자이자 정조의 어린 시절 임금은 통치자이자 스승이라는 군사론 (君師論 )을 제공한 스승으로서 그리고 왕위계승의 대의명분을 제공한 명의록 (明義錄 ) 초안을 작성함으로써 정조에게는 실질적 의리주인 (義理主人)이자 평생의 정치적 동지였다.

규장각 제학시기, 홍문관·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사 대사성 시절 그가 남긴 문학적, 사상적 수많은 업적으로 정조의 꿈을 뒷받침하며 18 세기 지성사를 이끌었다. 또한 그는 부친 고은당 김치만 (金致萬)이 걸었던 야인적 삶과 길을 같이 해 일생 동안 청류 (淸流)로서 삶을 일관하였다.  그러한 그의 삶은 그의 자표에도 잘 나타나 자신을 몽오산인 (夢梧山人)으로만 칭하였을 뿐이다.  사후 정조와 같이 종묘에 배향되었다. 

(사진; 김인구작가) 의왕시 왕곡동 왕림 마을입구의 600년  정승나무(은행나무) 
(사진; 김인구작가) 의왕시 왕곡동 왕림 마을입구의 600년  정승나무(은행나무) 

몽오집 제 1 권(505 쪽)에서는 시, 소차, 고사, 강의 등을, 제 2 권(476 쪽)에서는 서, 제발, 애사, 묘갈, 행장, 시장, 연보 등을 번역본에 실었다. 아쉬운 점은 이번 간행된 한글 본은 정조의 명에 의해 수습되었던 종가의 필사본과 비교할 때  40% 정도로 아직도 그의 야인으로서 삶을 지향했던 문학적, 예술적 활동 등이 많이 빠져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한국 고전 번역원의 전화 : 02-35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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