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GNA) 박상인의 숲과 문화산책, “신 이야기”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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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GNA) 박상인의 숲과 문화산책, “신 이야기” (제2편) 
  • 김진홍 논설위원
  • 승인 2021.02.21 1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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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박상인)한국의 전통적인 고무신
(사진제공:박상인)한국의 전통적인 고무신

[서울=글로벌뉴스통신]신발에 관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많다. 멋쟁이 여성들이 아슬아슬 하지만 멋내기로 즐겨 신는 하이힐의 시발은 중세 이후 유럽 도심에 오물이 하도 많아 이를 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또 동화에 나오는 신델렐라의 유리 구두, 왕자님을 만나게 되는 매개는 되나 그걸 신고 춤을 췄다는 것은 어불성설. 장식품 유리 구두에서 생긴 판다지이다--.그 많은 신발 중에 나는 오늘, 고무신 이야기 주로 해야겠다. 내가 어린 시절 6.25 전만해도 짚신 신은 사람이 거의 다 이다. 고무신은 1920년대 일본에서 건너와 조선 땅에도 고무신 공장이 시작. 실용성 경제성 편의성이 호평, 사랑을 크게 받아 귀중한 생필품이 된다.

일제가 미국과 전쟁 준비 목적으로 군수물자인 석유공급원 확보를 위해 버마. 인도네시아 등을 무력으로 침탈, 석유뿐만 아니라 그 지방 생산 고무원료까지 빼앗아 일본 땅에서 군수품은 물론 생활용품으로 만들어 사용하다가 우리나라에까지 고무 공장이 생기고 1930대 말 일본 군국주의가 전쟁에 핏발이 섰을 당시 동남아시아 점령 전승 선전, 기념품으로 당시로선 신기한 장난감 고무공과 거칠지만 짚 세기에 대해 혁신적인 신발, 물 안 새고 간편한 검정고무신을 조선 땅에 가지고 와서 어린 학생들에게는  일왕에 대한 충성심 경쟁. 일반 백성들에게 자국 왕의 위대함 애국심 유발했다.

(사진제공:박상인)한국의 전통적인 꽃신
(사진제공:박상인)한국의 전통적인 꽃신

선하지 않는 목적으로 우리 땅에 그렇게 우리 땅에 고무를 상륙시켰다. 광복 후 혼란기에 우리는 자동차 폐타이어로 만든 센들 모양의 신발과 접착제로 붙인 고무타이야 신발을 신었다. 그러는 중 부산 울산 등지에서 대규모 신발 공장이 들어서서 고무신이 일반화 됐었다.고무신에 연관된 여러 가지 말이 있다. 헌 고무신짝 버리듯 배반한다. 짚신 고무신도 짝이 있다. 

고무신 “구케의원”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 등 등. 이중 고무신 “구케의원”은 선거 때 고무신을 유권자들에게 돌려 당선된 의원님이고, 고무신 꺼꾸로 신다는 지금도 청춘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말이지만.  청춘 남여가 막 사랑을 시작할 무렵 남친이 군 입대 소집으로 죽내 사내하던 사이가 입대 후 금새 여친이 변절, 가슴이 찌 저지는 상황.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도 멀어진다는 진리가 적용된 것이다.

(사진제공:박상인)버드나무로 만든 조선시대 나막신 
(사진제공:박상인)버드나무로 만든 조선시대 나막신 

고무신의 신축성 때문에 화급히 도망치거나 달아날 때 현관이나 툇마루 아래 안쪽을 향해 가즈런히 놓인 고무로 된 신발 돌려 신을 새도 없이 급히 끌고 나가니 거꾸로 신을 수 밖에.. 뭐니 뭐니 해도 “고무신 꺼꿀 사랑의 업보” 전형적인 사례는 강화 전등사 대웅전 처마 네 귀퉁이에 올라앉은 나부 상 백미이다. 배신의 대가를 말 없는 조각으로~~.

(사진:글로벌뉴스통신DB)박상인 선생의 문화유적 해설 모습
(사진:글로벌뉴스통신DB)박상인 선생의 문화유적 해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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