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삭왕래(數數往來)가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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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삭왕래(數數往來)가 효도
  • 권혁중 기자
  • 승인 2014.06.2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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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을 이끌어 내는 선조의 지혜.

   
▲ (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이배용 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이배용)에서는 상속법 개정을 보며 옛 선조들의 상속에 대한 지혜를 소개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연구한 진양 하씨 가문 소장의 고문서에 따르면, 사육신으로 알려진 하위지의 조카 중 하원(河源:1451-1518)이라는 나이 일곱에 사육신의 변이 일어나자 봉화 와가집에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보존했고, 장성해서도 가화의 후유증은 늘 그를 고달프게 했다. 신분은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추락해 있었고, 항산(恒産)도 변변찮아 봉화․선산 등지를 돌며 방황하는 날이 많았다. 그나마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장인의 지원 속에 안동의 솔밤(松夜)에 정착할 수 있었고, 중년에는 하급직이나마 진력부위에 지내며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하원이라는 사람에게 자식도 없는 첩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신분은 평민이었고 이름은 감장(甘莊)이었다.  처(권씨부인)와 첩의 지위가 분명하던 당시의 세태로 보아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아갈 첩이 걱정되었던 하원은 감장에게 유서를 한 장 써 주었는데, 그 유서에는 감장에게 양도하는 재산을 생전에 감장 본인이 향유하다 일정 시기에는 다시 본처의 자식들에게 되돌려 주라는 단서를 달았다. 

한시적 사용과 귀속을 전제로 하면서 상속의 결정권은 감장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감장을 가장 공경히 받드는 자에게 양도할 것을 당부함으로써 서모에 대한 본처 자식들의 효성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1531년 4월 24일, 하원이 감장에게 유서를 써 준지 13년째 되는 해, 감장은 유서의 내용을 실천했다.  “가까이 살며 아침, 저녁으로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봉제사에도 정성을 다한” 손자 철민을 귀속 대상자로 지목하고 양도문서를 작성하였다.

  감장은 꼼꼼하게 만일의 분쟁을 우려하여 문서 요건도 따져 보증인을 세 사람이나 세웠고, 집필자도 따로 알선했다.「전력부위하원첩양녀감장(展力副尉河源妾良女甘莊)」이라 씌여진 양도자의 이름 아래에 손바닥 도장을 찍어 문서를 완성하였다. 

문서에는 철민이 비록 남편의 손자였지만 반상과 적서의 구별이 엄격했기에 감히 철민이라 부르지 못하고,「하철민씨(河徹岷氏)」란 존칭을 쓰며 예우도 잊지 않았다.

최근 상속법 개정으로 배우자 중심으로 상속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개정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상속이 효심과 연결되면서 효율적으로 효심을 이끌어 내는 선조의 지혜를 볼 수 있는 사례이며 삭삭왕래(數數往來) 하는 것이 효도라는 당연한 상식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사례이다.

   
▲ (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1541년 하원첩 양녀 감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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