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명성황후 생가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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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명성황후 생가터에서
  • 송영기 기자
  • 승인 2020.06.01 0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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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글로벌뉴스통신]

 

(민비가 9살부터 16살에 왕비로 간택될때까지 살았고, 여기서 왕비로 책봉된  아버지 소유의 조상 민유중의 옛집.근년에 서울에서 여주로 이건하였음)
(민비가 9살부터 16살에 왕비로 간택될때까지 살았고, 여기서 왕비로 책봉된 아버지 소유의 조상 민유중의 옛집.근년에 서울에서 여주로 이건하였음)

         

        여주, 명성황후 생가터

                          송 영 기

 

잠자는 누에처럼  뒷산은 온화하고

앞들엔 점봉천과 초생달 아미(蛾眉)안산(案山)

평온한 터에 나셨는데 

앞길 어이 험난했나

 

묘막집 살던부모  큰바위에 소원빌고

감고당 선대(先代)마마 꿈속 현몽 뜻새김에

의지할 가지없음이 

복(福)이되어 돌아왔네

 

  都雲(도운) 宋永起/시조시인,서울

 

(누에처럼 한일자로 뻐쳐 있는 낮은 구릉인 생가터 바로 뒷산,오른쪽끝에 서울에서 옮겨세운 감고당, 그옆 에 소원바위, 그리고 중간에 작은 마을, 오른 쪽끝 산아래에 명성황후가 태어난, 민유중의 묘막 큰 산림집이 있다)
(누에처럼 한일자로 뻐쳐 있는 낮은 구릉인 생가터 바로 뒷산,오른쪽끝에 서울에서 옮겨세운 감고당, 그옆 에 소원바위, 그리고 중간에 작은 마을, 오른 쪽끝 산아래에 명성황후가 태어난, 민유중의 묘막 큰 산림집이 있다)

 

(註) *고종황제 (1852 -1919) : 아명 命福, 본명 李熙 이며

       12세에 왕이 되고, 1866년 (고종 3년)에 왕비를 맞음.  



      * 명성황후 (1851-1895)  : 아명 민자영, 8세까지 여주

        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죽은후 아버지가 물려받은 조상

        민유중의 집이었던 서울 감고당 저택에서 어머니와

        올라와 8년간 살았다. 이 집에서 16세에 왕비로 간택되니,

        고종보다 1년 연상임. 

 

      *민비의 아버지 민치록(閔致錄)은 서인의 거두인 민유중의

        6대손으로 문음(門陰)으로 장릉참봉,현감,현령,군수등을

        지내다가 여주로 낙향하여 민유중의 묘막에서 살았다.

     

     * 당시 서인 西人의 거두  영의정 민정중 (閔鼎重)의 아우인

       민유중(閔維重)은 대학자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과 

       동춘당 송준길 (同春堂 宋俊吉)의 문하생(問下生)이었다.

 

       동춘당의 딸과 제자 민유중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이니, 생부 민유중은 주상(主上)인 숙종임금의 

       국구(國舅 - 장인)이고, 송준길은 민유중의 장인이었다.

 

        명성황후 (고종임금)의 생부 민치록은 인현왕후(숙종임금)의

        생부 민유중의 6대손이니, 한 직계 민씨집안에서 왕비가 두명

        이 나온 것이다.      

 

     * 소원바위 : 명성황후 생가 옆에 있는 둥글고 큰 바위로

       아버지 민치록이 1남2녀 자식 모두 일찍죽어 부부가

       정성을 들여 기도하고 53세 때 무남독녀 민비를 낳았다

 

(감고당 옆 산 아래,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리며 소원을 빌던 바위, 민치록이 53세에 딸을 낳음)
(감고당 옆 산 아래,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리며 소원을 빌던 바위, 민치록이 53세에 딸을 낳음)

 

     * 감고당 (感古堂) : 숙종계비 인현왕후가 친정 아버지

       민유중을 위하여 안국동에 지어준 집인데,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비된후 유폐되어 5년간 살았고,그후 명성황후

       가 8세후 16세에 간택될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처녀시절 여기서 살때 인현왕후가 꿈에 나타나 " 너는 장차

       내 자리를 대신할것"이라 하였다함.

       지금은 감고당을 서울 안국동,덕성여대를 거쳐 여주의 민황후 

       탄생지로 재이전하여 이건하였다.

 

(짚앞의 지척에 있는 점봉천 시내와  집에서 바라보이는 초생달 닮은 역시 크지않은 안산 아미산 - 이러한 양택풍수가 아름다운 미인을 낳는 최고 길지라 한다)
(짚앞의 지척에 있는 점봉천 시내와 집에서 바라보이는 초생달 닮은 역시 크지않은 안산 아미산 - 이러한 양택풍수가 아름다운 미인을 낳는 최고 길지라 한다)

 

    *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 (石坡 李昰應 1820-1898)은

      민비와 친척인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을 받고

      당시 외척 안동김씨 장김(壯金)들과 같은 세도를 방지하기

      위하여,부모도 형제자매도 없는 고아 민규수를 왕비로 간택

      낙점하였다.  

      그 때 고종은 이미 궁인 이씨 소생의 자식 완화군이 있었고,

      대원군은 훗날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할 뜻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아버지 대원군과 총명하고 야망이 만만치 않은

      며느리 민비와 결정적으로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둘 사이는

      물론 아들 고종과도 정적이 되는 단초가 되었으니,아이러니이다.

(위압감을 주는 산천이 주위에 없는 평온하고 아담한 마을이다)
(위압감을 주는 산천이 주위에 없는 평온하고 아담한 마을이다)

 

 

(마침 코로나19로 문을 열지 않아서, 점봉천 방뚝길을 걸으며 나무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멀리서 숲을 바라볼수있었다 할까. 저 욱어진 푸른낙엽이 지고 난 겨울에는 그저 밋밋한 언덕같은 뒷산으로 보일것이다)
(마침 코로나19로 문을 열지 않아서, 점봉천 방뚝길을 걸으며 나무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멀리서 숲을 바라볼수있었다 할까. 저 욱어진 푸른낙엽이 지고 난 겨울에는 그저 밋밋한 언덕같은 뒷산으로 보일것이다)

(사진촬영 : 글로벌 뉴스통신, 송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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